지난번 신경안정제(항불안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요, 이번에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중독(의존, 사용장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흔히 중독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마약이나 술 중독이 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나요? 저는 물질에 중독이 되어 폐인이 된 사람이 떠오는데, 이런 상태가 아니더라도 의학적으로는 중독의 상태일 수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중독은 영어로 addiction, dependence, intoxication 이 세 가지 상태를 모두 의미 합니다.
첫째로, 자꾸 생각나서 계속 하게 되는 상태인 addiction, dependence.
둘째로, 과도한 용량이 들어가서 물질에 완전히 취해 있는 상태인 intoxication.
이번 글에서는 addiction, dependence에 해당하는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말로는 '사용장애' 혹은 '의존'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신경안정제에 대한 의존은 정신의학 진단체계에서는 '진정제, 수면제 또는 항불안제 사용장애'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일 때 신경안정제에 대해 의존성이 있다고 이야기 말할 수 있을까요?
의학적인 진단체계에서는 의존성이 있는 경우 11가지 정도의 행동 상태가 나타난다고 보고 있고, 이중 2가지 이상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의존성이 있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 약을 종종 의도한 것보다 많은 양 또는 오랜 기간 사용
- 약을 줄이거나 조절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혹은 실제로 줄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실패
- 약을 구하거나 사용하거나 혹은 그 효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냄
- 약에 대한 강한 바람, 갈망, 욕구가 있음
- 반복적인 약의 사용으로 직장, 학교, 가정에서 생활이 이전과 다르게 쉽지 않음
- 약의 영향으로 지속적인 혹은 반복적인 대인관계 문제
- 약의 사용으로 인해 중요한 업무 혹은 여가 활동을 포기하거나 시간이 줄어듦
- 신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도 약을 계속 사용(예로 약으로 인해 졸립거나 멍한 상태에서 자동차 운전을 하거나 기계를 조작하는 등의 상황)
- 약으로 인해 신체적, 심리적 문제가 나타난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사용
-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경우: 이전에 먹던 용량이 효과가 없어서 점차 더 많은 용량을 먹게 됨
- 약에 대한 금단이 생긴 경우: 약을 먹지 않으면 감정의 변화(불안, 예민함, 초조함), 불면, 가슴 떨림, 식은땀, 손떨림, 속이 울렁거림, 구토, 일시적인 환각 또는 착각, 경련 등이 나타남
위와 같은 상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신경안정제에 대한 의존성이 생긴 것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마약이나 술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왜 신경안정제에 대한 의존성이 생기는 것일까요? 어떤 상황에서 잘 생기는 걸까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살펴봅시다.
40대 초반의 OO씨는 최근 회사에서 업무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 밤에 자려고 누우면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져 잠이 드는 게 어렵다. 예전에는 눕기만 하면 5분~10분이면 잠이 들었는데, 요새는 낮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앞으로 일들이 걱정도 되고 생각의 고리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잠은 늦게 들고,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으니 낮에 너무 졸려서 죽을 맛이다.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병원에 가보기로 한다.
병원에 갔더니 신경안정제를 처방해주었고, 자기전에 먹어봤더니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밤에 잠이 잘 오니 그 정도는 견딜만했고, 며칠 먹다 보니 아침에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회사일이 잘 풀려야 하는데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제는 약을 먹어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약을 한개씩만 먹으라고 했었는데, 효과가 없으니 이제 두 개씩 먹어보기로 한다. 두 개를 먹었더니 다시 잠이 잘 온다. 하지만 어떤 날은 두 개를 먹어도 잠이 안 와서 세 개까지 먹고 잠드는 날도 있다. 약을 많이 먹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긴 하지만 잠을 못 자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어쩔 수 없다.
몇 주가 지나고, 회사일이 너무 잘 풀렸다. 스트레스가 줄어드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이제 약을 안 먹어도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약을 먹지 않고 잠을 자기로 해본다. 첫날은 약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잘 잤다. 하지만 이틀째부터는 밤에 잠이 잘 안 온다. 뭔가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들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느낌도 든다. 이렇게 며칠을 못 자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OO 씨는 다시 병원을 찾아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로 한다.
이 상황은 가상의 상황인데, 신경안정제(항불안제) 의존성을 의심해 볼 만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약물 중독자의 모습과 비슷한가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경안정제 의존성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경우가 많아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경안정제(항불안제) 의존성이 생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약을 자의로 조절해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효과가 없다고 약을 많이 먹다 보면 약에 더 의존하게 되고 금단 증상이 발생할 위험성이 커집니다. 효과가 없다면 주치의와 꼭 상의를 해서 약의 용량을 조절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만 약을 복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두번째, 비약물적인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경안정제는 증상의 일시적인 완화를 도와주는 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다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약이 없이도 증상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불면증이 심한 경우, 수면 습관을 먼저 바꿔야 합니다. 불안감이 심한 경우 약 외에 안정화 요법과 같은 비약물적 방법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신경안정제(항불안제)에 의존성이 생겼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존성이 생겼다고 겁을 먹고 약을 바로 끊어버리면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약을 바로 끊게 되면 위에 설명한 금단 증상들이 생길 수 있어 생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세 개, 1주 뒤엔 두 개, 2주 뒤엔 한 개 이런 식으로 말이죠.
약을 줄여 나가는 과정에서 불안감, 불면증이 계속 될 수 있는데, 이때는 신경안정제 대신 의존성이 없는 다른 약들로 조절해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존성이 의심될 때는 주치의와 꼭 상의하여 약을 적절하게 줄여나가고 그 기간 동안 대체약으로 증상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신경안정제(항불안제)는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정말 좋은 약이지만 이렇듯 중독(의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서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문헌: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 제5판 (DSM-5), Kaplan and Sadock Synopsis of Psychiatry 11th edition, Soyoka M. Treatment of benzodiazepine dependence, N Engl J Med. 2017 Mar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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